어느덧 데뷔 10년차를 맞이한 그룹 레드벨벳 (Red Velvet)은 케이팝 역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지닌 팀으로 언급해볼 만 하다. 지금은 의미가 다소 희석되긴 했지만 활동 초기 ‘RED’와 ‘VELVET’으로 이름 붙여진 양 극단의 콘셉트를 오가면서 자신만의 색깔을 확고히 만들면서 탄탄한 입지를 다져왔다. 곡의 성향에 따라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럭비공 같은 행보도 존재했지만 이것 또한 레드벨벳만의 개성으로 자리 잡았다.
지난 13일 발매된 정규 3집 (칠 킬)은 그런 점에서 레드벨벳 10년사의 집대성이면서 현 시점에선 안개 속에 쌓인 미래를 동시에 담은 작품으로 언급할 만하다. 이지 리스닝 혹은 비트 중심으로 변화하고 있는 이른바 ‘4세대 걸그룹’들의 음악이 음원 순위를 장악하고 있는 외부의 흐름에 구애 받지 않고 여전히 자신들이 해왔던 방식 그대로 10곡의 트랙을 완성시켰다.
고풍스러운 음반 커버와 실물 패키지, 뮤직 비디오 등의 구성만 보더라도 여전히 레드벨벳 다운 그림을 그려나가고 있다. 예전의 답습이 아닌, 발전적 방향으로의 완성물이라는 점에서 올 연말 눈여겨 볼 만한 케이팝 음반 중 하나로 손꼽아 볼만 하다.
기괴한 분위기의 뮤직 비디오, 중의적인 곡 제목
그동안 레드벨벳은 타이틀 곡 뮤직비디오를 통해 종종 보는 이들의 머릿 속을 복잡하게 만들어온 팀 중 하나였다. 기괴한 분위기 속에 숨겨진 의미를 다수 담았던 ‘Peek-A-Boo’, ‘Bad Boy’가 그래왔고 신보의 동명 머릿곡 ‘Chill Kill’ 역시 마찬가지다. 제목 부터 복수의 뜻을 내포하고 있지 않은가? 멋지게 해내다, 혹은 편안함(고요함)을 깨뜨리다 등 각양각색의 해석이 발표 이후 곳곳에서 쏟아지고 있다. 특히 뮤직비디오는 마치 한편의 공포(살인) 스릴러물처럼 완성되었다.
초반부 과거 배경의 레드벨벳 vs 현재의 레드벨벳 사진을 살펴보면 기괴한 장면이 목격된다. ‘과거’ 레드벨벳 사진 속에 동석한 남성의 목이 잘리는 듯한 섬찟함이 포착되는 것이다. 피가 묻어 있는 멤버 웬디의 얼굴부터 붉은 액체를 물로 씻어내고 삽을 들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내용 등은 각종 스릴러 드라마, 영화 속 우리가 흔히 봐왔던 범죄였다. 심지어 집에 불을 지르고 5명은 이를 무대 배경 삼아 흥겹게 춤을 추는 극단적인 행동을 진행한다.
그리고 이들의 기이한 행동은 연이어 출동한 경찰차가 현장에 도착하면서 이내 마무리 되었다. 어지간한 공포물 이상의 잔혹함을 담는 시도를 과연 그 어느 팀이 단행할 수 있었을까? 과거 호불호의 논쟁을 자아냈던 몇몇 머릿 곡들과 마찬가지로 ‘Chill Kill’ 역시 공개와 동시에 팬들 사이 각양 각색의 의사 표현이 이어졌다.
탄탄한 보컬 화성…멋지게 완성한 데뷔 10년차 그룹의 관록
영화 <장화 홍련> 또는 <아가씨>의 케이팝식 재현일지, 혹은 과거 ‘Peek-A-Boo’ 뮤비 속 이야기의 연장선상일지는 해석하는 팬들의 몫이겠지만 늘 골치 아프지만 행복한 궁금증을 안겨주는 레드벨벳만의 만들어내는 음악적 즐거움 중 하나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어 보인다.
타이틀 곡 후보 중 하나였다는 두번째 트랙 ‘Knock Knock (Who’s There)’는 ‘Chill Kill’의 흐름과 유사한 정체성을 담고 있다.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멤버들의 코러스를 배경 삼아 묵직한 베이스와 스트링 선율이 달콤함과 아찔함 사이에서 절묘한 줄타기를 시도한다.
느림 템포의 R&B 지향의 세번째 트랙 ‘Underwater’는 익히 잘 알고 있던 레드벨벳 방식의 팝 사운드로 채워 넣었다. 웬디-조이-슬기 등의 애조 섞인 보컬이 인상적인 ‘Nightmare’는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면서 왈츠 풍 악곡 전개에 힘입어 뮤지컬 <레베카> 혹은 박찬욱 감독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만든다.
이렇듯 10곡이 수록된 정규 음반 답게 다양한 장르를 녹여 낸 신보 의 음악적 공통 분모는 탄탄하고 두텁게, 그리고 아름답게 쌓은 멤버들의 보컬 화성이다. 요즘 케이팝 음악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이와 같은 작법에 힘입어 여전히 레드벨벳 답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외치는 듯 하다.
아직까지 재계약에 대한 확답이 없는 불안정한 상황에서 나온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Chill Kill>은 실험성과 대중성, 그리고 개성을 듬뿍 담아냈다. 마치 훈장 마냥 스스로 자랑스러워해도 좋을 만큼 데뷔 10년차 그룹이 만들어낸 음반은 또 한번 우리들의 눈과 귀를 매혹적으로 사로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