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를 누비며 전투를 벌이던 천하무적 전사는 잠시 잊어도 좋다. 에스파(카리나, 윈터, 지젤, 닝닝)가 세번째 미니 음반 을 통해 새로운 이미지 변신에 나섰다. 그동안 에스파는 이른바 ‘광야’라는 세계관에 바탕을 둔 ‘Black Mamba’, Next Level’, ‘Savage’ 등으로 전투에 능숙한 전사의 캐릭터로 팬들을 사로 잡은 바 있다.
그런데 지난 5월 8일 공개된 신보와 타이틀 곡 ‘Spicy’는 기존 에스파의 이미지를 내려 놓고 발랄한 하이틴 영화 속 주인공으로 급격한 변화를 도모했다. 당초 계획대로라면 지난 2월 무렵 새 음반이 나왔어야 하지만 소속사 SM엔터테인먼트의 경영권 분쟁 및 이수만 전 총괄 PD의 무리한 가사 개입 논란 등이 빚어지는 등 팀 외부적인 문제로 3개월이 지난 후에 비로소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지난주 선공개곡 ’Welcome To My World’로 가볍게 몸을 푼 에스파는 ‘Spicy’라는 비트 충만한 댄스곡으로 앞세워 본격적인 활동에 돌입했다. 이 팀의 세계관에 큰 비중을 차지하던 빌런이 사라지면서 에스파는 모처럼 족쇄가 풀린 평원 속 표범 마냥 훨씬 자유분방하게 케이팝 무대로 화려하게 돌아왔다.
가상 현실 대신…진짜 현실로 들어오다
총 6곡이 수록된 에서 눈과 귀를 집중하게 만드는 트랙은 두말할 것 없이 타이틀곡 ‘Spicy’ 였다. 그동안 이들의 음악은 ’광야‘ 세계관의 극대화를 시도한 미래지향적 콘셉트 및 강한 색채의 소리, 아바타를 내세운 가상 현실의 극대화를 유도해왔다.
그런데 신보의 수록곡에선 그런 요소가 상당부분 사라지거나 희석되었고 이제 에스파는 ‘전사’라는 다소 무겁고 어두운 이미지에 벗어나 멤버들의 현재를 투영한 자유 분방함이 먼저 가장 먼저 포착된다. 자칫 케이팝 사상 초유의 ‘나무심기 노래’가 등장할 수도 있었던 위기를 벗어나 이와 같은 변화가 가장 심하게 담긴 것이 ’Spicy’이다.
통통 튀는 드럼 비트와 맞물려 심하게 변조된 신시사이저 리프가 가사마냥(”심장을 파고 드는“) 경쾌한 질주에 돌입한다. 멤버들 각자가 서로 짧게 끊어서 주고 받는 보컬의 조합은 이 노래가 지닌 역동성을 극대화시킨다. 처음 들었을 땐 다소 복잡함을 느꼈던 이들도 이후 중독성에 빠져들 만큼 치밀하게 짜여진 곡의 설계는 지난해 미니 2집 음반 가 설치했던 진입장벽의 높이를 대폭 낮추는 효과도 가져온다.
나이비스의 데뷔 전초전
에스파의 세계관의 가상세계 속 조력자 ’나이비스‘가 이번 음반에선 몽환적인 분위기의 ‘Welcome To My World’를 통해 현실 세상으로 진입했다는 점은 이번 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목 사항 중 하나다. 이는 올해 중 데뷔를 준비하고 있는 나이비스를 위한 전초전 역할을 담당해준다.
전형적인 에스파식 일렉트로닉 팝 ’Salty & Sweet’와 더불어 두 트랙들은 신작 음반의 변화 속에서도 가상 세계를 앞세웠던 에스파의 기본 뿌리는 여전히 남아 있음을 증명해준다. 반면 ‘Thirsty’에선 사랑의 감정을 품에 안으면서 현실 세계의 이야기에 빠져든 에스파의 현재 모습을 그려낸다. 이와 같은 기조는 팬들에 대한 고마움을 담은 발라드 곡이자 마지막 트랙 ’Til We Meet Again’을 통해 확실한 마침표가 찍힌다.
완벽하진 않더라도…최선의 선택
일명 ‘ㄷ’ 춤과 더불어 코로나 정국 속에서 오감만족을 선사했던 ‘Next Level’의 대성공과 ‘Girls’의 시행착오가 교차하면서 에스파는 잠시 숨고르기를 하기도 했다. 생뚱맞았던 ‘나무 심기’ 논란 속에 지연되는 신보의 발표는 제법 긴 기다림을 지녔던 이들에겐 반가운 선물임이 분명해 보인다.
SM소속 아티스트들 조차 좀처럼 이해 못하던 ‘광야’ 세계관의 복잡한 이야기 대신 는 음악 본연의 목적에 충실하고자 하는 노력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물론 이로 인한 과도기적인 행보 역시 일정 부분 노출된다. 수록곡들이 끈끈한 결속력을 지녔다기보단 잘 짜여진 싱글 모음집에 가까운 조합을 이루면서 기존 팬들에선 다소 이질적으로 다가올 소지도 지니고 있다.
에스파라는 팀이 가졌던 강력한 전사의 이미지를 벗어 던진 것이 과연 큰 소득이 될지 아니면 잘못된 선택일지에 대한 판단 역시 아직은 유보 단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팀 활동에 제약을 가져왔던 “어른들의 사정”이 상당부분 해소되면서 는 에스파 제2막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으로선 제 역할을 톡톡히 담당해준다. 완벽하진 않더라도 최선의 선택지임은 분명해 보인다.